
김형수는 떨리는 손으로 창을 꽉 쥐고 나무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햇살 아래 그의 찢어진 양복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 마을 주민들의 시선은 마치 칼날처럼 그의 온몸을 훑었다. 특히 그가 손에 든, 고블린의 이빨이 박힌 조악한 창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길을 잃은 여행자라고? 이 깊은 숲 속에서, 그런 옷차림으로? 그리고 그 손에 든 것은 또 무엇인가?”
노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강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밭에서 일하던 다른 주민들, 심지어 아이들조차도 그의 모습을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김형수는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말을 잘못하면 당장이라도 공격당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저는… 저는 이곳에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밤새 숲을 헤매다 겨우 살아남았고, 저 창은… 숲의 짐승으로부터 저를 보호하기 위해 급히 만든 것입니다.”
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려 노력했다. ‘버스 사고’나 ‘이세계’ 같은 말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다만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떨어졌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노인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짐승이라니… 숲의 짐승치고는 그대가 너무 멀쩡해 보이는군. 그리고 그 옷은 어디 세상에서 왔기에 이리도 요상한가?”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저는 단지 길을 잃었을 뿐입니다. 어젯밤에는 저를 공격하는 작은 괴물을 겨우 물리쳤습니다. 그래서 저 창을 만든 것입니다.”
김형수는 ‘괴물’이라는 말에 노인의 눈빛이 순간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든 창을 조금 더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날카로운 고블린의 이빨이 햇살에 희미하게 반짝였다.
“괴물이라니… 고블린이라도 만났다는 건가? 그런데 그대 혼자서?”
밭에서 일하던 건장한 청년 하나가 피치포크를 고쳐 쥐며 나서자, 노인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노인의 시선은 김형수의 초췌한 얼굴과 찢어진 옷, 그리고 창에 박힌 이빨을 번갈아 살폈다. 그의 눈썰미는 김형수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날카로웠다.
“고블린의 이빨이군… 제법 솜씨가 좋았나 보네. 허나, 이 숲은 낯선 자를 쉽게 용납하지 않는 법. 우리 마을 또한 마찬가지다.”
노인은 잠시 침묵했다. 김형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 순간이 그의 운명을 결정할 터였다. 그는 문득 인벤토리에 있던 숲돼지 고기가 생각났다. 생존을 위해 사냥했던, 그리고 막 구워 먹었던 그 고기. 그의 가장 확실한 증거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숲에서 사냥한 고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숲돼지를 잡았습니다. 결코 해를 끼치려 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구워진 숲돼지 고기 한 덩이를 꺼냈다. 따뜻한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고기가 그의 손바닥 위에 놓이자,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작은 술렁거림이 일었다. 고소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마을 쪽으로 흘러갔다. 특히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숲돼지 고기… 제법 크군. 이 정도로 험한 숲에서 사냥을 했단 말인가?”
노인의 경계심이 한층 누그러진 듯 보였다. 고블린의 이빨과 숲돼지 고기. 이 두 가지는 그가 숲에서 살아남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숲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 이것은 그가 마냥 허황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좋다. 일단 마을로 들어와라. 허나, 우리 마을의 규칙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름이 뭔가?”
“김형수입니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김형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다른 주민들에게 시선을 보내며 손짓했다. 주민들은 여전히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적대적인 기색은 없었다. 노인은 밭에서 일하던 청년에게 지시했다.
“칼렌, 이 이방인을 마을 안으로 데려가 쉴 곳을 마련해주고, 우리 마을의 규칙을 설명해 주거라. 그리고 마을 원로들을 불러 모아라. 이 일을 논의해야겠으니.”
“예, 촌장님.”
칼렌이라고 불린 청년은 여전히 김형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한 듯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김형수에게 앞장서라는 듯 턱짓을 했다. 김형수는 칼렌의 뒤를 따라 마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흙먼지가 이는 비포장길을 따라, 작고 아담한 통나무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굴뚝에서는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멀리서는 가축 소리도 들려왔다.
“마을이라니… 정말이구나.”
마을의 풍경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원시적이었다. 전기도, 수도도, 그 흔한 유리창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몇몇 아이들이 낯선 그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빤히 쳐다봤다. 김형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지만, 아이들은 이내 뒤돌아 도망쳤다.
칼렌은 그를 마을 한쪽 구석에 있는 낡은 창고 같은 곳으로 안내했다. 창고 안은 짚으로 만든 침상과 작은 나무 탁자 하나가 전부였다.
“일단 여기서 쉬어라. 촌장님께서 너를 부르시기 전까지는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칼렌 씨.”
칼렌은 대답 없이 창고 문을 닫고 떠났다. 김형수는 창고 안에 홀로 남겨졌다. 그는 짚 침상에 주저앉았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자 극심한 피로가 다시 몰려왔다. 이제 더 이상 숲 속에서 혼자 밤을 새울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불확실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상태창을 열었다.
`[종족: 인간]`
`[레벨: 2]`
`[경험치: 15/50 (다음 레벨까지)]`
`[체력: 90/100]`
`[마나: 42/50]`
`[힘: 10]`
`[민첩: 8]`
`[지능: 15]`
`[운: 5]`
`[스킬 포인트: 1]`
체력과 마나는 약간 소모된 상태였다. 숲돼지를 잡아서 경험치를 조금 더 얻었고, 식량을 확보했다는 점은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스킬 포인트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스킬을 올리는 것이 가장 현명할까? 마을 사람들과의 소통, 혹은 자신을 방어할 능력?
“안전한 곳에 들어오긴 했지만… 이곳도 완전히 안전한 건 아니야. 그들이 날 믿을 때까지는 경계를 늦출 수 없어. 하지만 동시에 뭔가 도움이 되는 것을 보여줘야 해.”
그는 ‘통찰’ 스킬을 사용해 창고 내부를 스캔했다.
`[낡은 창고]: 건축 자재 부족으로 허술하게 지어짐. 쥐구멍 발견. 틈새로 미약한 외풍 유입.`
`[짚 침상]: 낡고 건조함. 작은 벌레 서식 가능성 높음. 온기 부족.`
`[나무 탁자]: 오래된 나무로 제작. 표면에 흠집 다수. 간단한 물품 보관용.`
창고는 생각보다 아늑하지 않았다. 그는 마을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칼렌의 경고를 떠올렸다. 아마 그를 감시하고 있을 터였다. 이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들의 지시를 따르며 순응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것인가?
“마을…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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