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수는 동굴 깊숙한 곳, 샘물 옆 바위 틈에 기대어 짧은 잠을 청했다. ‘작은 불덩이’가 희미하게 주변을 비추고 있었지만, 피로 누적으로 인해 스르르 눈이 감겼다. 꿈속에서도 그는 끝없이 숲을 헤매고, 괴물과 싸우는 악몽에 시달렸다. 버스 사고의 충격, 고블린과의 사투, 이세계라는 현실… 모든 것이 뒤엉켜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그러나 그의 본능 깊은 곳에서는 ‘살아야 한다’는 강렬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다음 날 아침, 동굴 바깥은 여전히 낯선 숲의 고요함으로 가득했다. 김형수는 몸을 일으켰다. 잠은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맑은 샘물 덕분에 갈증은 가셨고, 어제보다 체력이 조금 회복된 것을 느꼈다. 상태창을 열어보니 체력은 90/100. 아직 배는 고팠다.
“식량… 무조건 찾아야 해. 굶어 죽을 순 없어.”
그는 어제 주워둔 나뭇가지를 쥐고 동굴 입구를 나섰다. 어두컴컴한 동굴을 벗어나자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숲은 여전히 울창했고, 알 수 없는 새소리와 곤충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그는 ‘통찰’ 스킬을 활성화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스킬 포인트 1은 아직 사용하지 않았다. 당장은 어떤 스킬이 더 필요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숲은 위험했지만, 동시에 생명의 보고였다. ‘통찰’ 스킬 덕분에 독성이 있는 식물과 먹을 수 있는 식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눈에 띄는 식물들을 스캔했다.
`[숲딸기 덤불]: 새콤달콤한 열매가 열림. 독성 없음. 식용 가능. 생명력 미약하게 회복.`
`[뿌리 식물]: 땅속 줄기가 영양가 풍부. 삶거나 구워서 먹는 것이 좋음. 소화에 도움.`
`[매콤한 풀잎]: 향신료로 사용 가능. 고기 비린내를 잡는 데 효과적. 소량의 마력 잔류.`
“숲딸기? 뿌리 식물이라니… 다행이다.”
그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숲딸기를 따서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새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며칠간 물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그의 위장에 작은 위로가 되었다. 뿌리 식물도 몇 개 캐내고, 매콤한 풀잎도 소량 채집했다. 이제 문제는 단백질이었다. 그는 ‘고블린의 이빨’과 ‘고블린의 가죽’이 여전히 인벤토리에 있었다. 이 이빨을 이용해 사냥에 쓸 만한 도구를 만들어야 했다.
“나뭇가지에 이빨을 박으면… 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적당히 단단한 나뭇가지를 찾아 끝을 날카롭게 깎았다. 비록 손으로 깎는 것이라 완벽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몽둥이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고블린의 이빨’을 꺼내들고, 바닥에 있던 돌멩이를 이용해 나뭇가지 끝에 박아 넣으려 시도했다. 쉽지 않았다. 이빨은 생각보다 단단했고, 나무는 질겼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이빨 하나를 나뭇가지 끝에 간신히 박아 넣는 데 성공했다. 고블린 가죽을 찢어 만든 끈으로 대충 감아 고정시켰다.
“이 정도면… 쓸만하겠지.”
이제 그는 조잡하지만, 최소한의 창을 손에 쥐게 되었다. ‘초보 검술’ 스킬 덕분인지, 창을 쥐는 손에 어색함은 있었지만 묘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는 숲 속을 더욱 깊이 들어가며 사냥감을 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덤불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통찰’을 사용했다.
`[숲돼지 새끼]: 어미에게서 떨어진 어린 개체. 성격 온순. 공격성 낮음. 좋은 식량원.`
“숲돼지 새끼… 저거라도 잡아야 해.”
그는 조심스럽게 숲돼지 새끼에게 다가갔다. 새끼 숲돼지는 땅을 파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김형수는 숨을 죽이고 가장 적절한 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온몸의 힘을 실어 창을 휘둘렀다. ‘초보 검술’ 스킬의 영향이었을까, 그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숲돼지 새끼는 맥없이 쓰러졌다.
`[숲돼지 새끼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15를 획득했습니다.]`
`[숲돼지 고기 (Forest Boar Meat) 2개, 숲돼지 가죽 (Forest Boar Hide) 1개 를 획득했습니다.]`
“하아… 잡았다…”
이번에는 지난번 고블린 때만큼의 공포는 없었다. 대신, 사냥에 성공했다는 안도감과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는 숲돼지 고기를 들고 조심스럽게 동굴로 돌아왔다. ‘작은 불덩이’를 다시 피우고, 주변에 모아둔 나뭇가지들로 불을 지폈다. 따뜻한 온기가 동굴 안을 채웠다.
“이제… 요리할 시간인가.”
그는 숲돼지 고기를 나뭇가지에 꿰어 불에 구웠다. 고기가 익어가면서 고소한 냄새가 동굴 안에 가득 퍼졌다. 채집한 뿌리 식물도 불에 구웠고, 매콤한 풀잎으로 고기의 잡내를 잡았다. 단순한 구이였지만, 이세계에서 처음 맛보는 따뜻한 식사였다.
“크으… 이 맛이지.”
고기는 쫄깃했고, 뿌리 식물은 달콤했다. 매콤한 풀잎의 향이 더해져 환상의 맛을 냈다. 그는 허겁지겁 고기를 먹었다. 육즙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굶주림이 해소되자, 정신도 한결 맑아졌다.
***
배를 채운 김형수는 동굴에서 나와 다시 숲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식량은 어느 정도 확보했지만, 언제까지 이 동굴에만 숨어 지낼 수는 없었다. 좀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혹시 모를 마을이나 다른 생존자의 흔적을 찾아야 했다. 그는 동굴 주변을 중심으로 점차 활동 반경을 넓혔다.
‘통찰’ 스킬을 활성화한 채, 그는 주변의 모든 것을 스캔했다. 이번에는 단순히 식물이나 바위가 아닌, 인위적인 흔적에 집중했다. 숲은 짙었고, 나뭇가지들은 마치 거대한 팔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중,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래된 나무의 껍질에 새겨진 희미한 표식이었다.
`[오래된 표식]: 칼로 새겨진 듯한 문양. 인간의 작업 흔적. 특정 방향을 지시하는 듯함. 약 50년 이상 경과.`
“이건… 사람이 만든 거야!”
김형수의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고블린을 죽였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흥분이었다. 희망이었다. 이세계에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는 표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숲은 여전히 울창했지만, 표식이 나타난 이후로는 왠지 모르게 길이 좀 더 다듬어진 느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표식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돌무덤처럼 쌓인 작은 바위 더미 위에 놓인 나무 조각이었다.
`[길 안내 목각]: 투박하지만 정교하게 깎인 나무 조각. 거주지의 방향을 지시. 외부인의 방문을 경계하는 문양 존재.`
“거주지! 마을이 있을지도 몰라.”
경계하는 문양이라는 정보에 잠시 주춤했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혼자서 야생에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희미하게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기척도 느껴졌다.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이며 표식을 따라갔다. 숲이 점차 옅어지고, 햇살이 더 많이 쏟아지는 개활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수십 채의 통나무집과 진흙으로 지어진 작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주변에는 낮은 울타리가 둘러져 있었고, 밭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농작물을 가꾸고 있었다.
“마을… 진짜 마을이야!”
그는 숨을 헐떡이며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현대 문명의 도시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곳에서 사람의 흔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세계의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적대적이라면? 그는 자신의 찢어진 양복과 엉망이 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봐도 수상한 이방인이었다.
마을 안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른들의 대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는 망설였다. 모습을 드러내야 할까? 아니면 좀 더 관찰해야 할까? 그의 눈은 마을의 풍경을 스캔하듯 훑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단순했고, 손에는 괭이나 삽 같은 농기구가 들려 있었다. 특별한 무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밭에서 일하던 한 노인이 고개를 들어 그의 쪽을 빤히 쳐다봤다.
“거기 누구인가? 왜 숨어 있는 겐가?”
노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숲 전체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김형수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들켰다. 그는 더 이상 숨을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창을 꽉 쥐고, 나무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저… 저는… 길을 잃은 여행자입니다.”
노인의 눈빛은 매서웠다. 밭에서 일하던 다른 주민들도 일제히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몇몇은 손에 든 농기구를 고쳐 쥐었다. 긴장감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김형수는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명확히 인지했다. 이곳에서의 첫 만남이 그의 생존에 큰 영향을 미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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