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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9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김형수는 꽉 막힌 퇴근길 버스 창밖을 멍하니 응시했다. 넥타이는 이미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셔츠는 하루 종일 시달린 흔적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찌뿌둥한 어깨와 허리 통증은 마치 제2의 피부처럼 그를 감싸고 있었다.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에 아직도 대리 직함을 달고 있는 자신도, 끝없이 반복되는 회색빛 일상도 모두 지긋지긋했다.

김형수“젠장, 오늘도 편의점 도시락이냐?”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텅 빈 버스 안에서는 그마저도 크게 울리는 듯했다. 아니다. 오늘은 특별히 할인하는 치킨 한 마리에 캔맥주 한 잔을 걸칠까. 그 작은 행복 하나가 그의 지친 하루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낙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사소한 것에도 기대감을 갖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위로가 되었다.

버스가 덜컹거리며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그때였다. 갑자기 옆 차선에서 달려오던 트럭 한 대가 신호를 무시하고 튀어나왔다. 굉음이 귓가를 찢고 들어왔다. “크아아악!”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형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느낌, 그리고 모든 것이 암전(暗轉) 되었다.

***

고요했다.
형수는 눈을 떴다. 온몸이 쑤시는 듯했지만, 의외로 고통은 크지 않았다. 그보다는 기이한 침묵이 그를 압도했다. 방금 전까지 아비규환이었던 현실이,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진 공간이었다.
그가 있는 곳은 울창한 숲속이었다.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낯선 색깔로 반짝였다. 공기는 깨끗했지만, 알 수 없는 흙냄새와 풀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평생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김형수“여… 여긴 어디야? 내가 죽은 건가?”

목소리가 낯설게 갈라졌다. 손을 들어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멀쩡했다. 찢어진 양복 차림은 여전했지만, 출혈이나 골절 같은 심각한 외상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기괴한 형태의 풀들과 거대한 이끼 낀 바위들이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이질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그때, 눈앞에 투명한 창이 팝업처럼 떠올랐다.

`[환영합니다, 이세계의 여행자 김형수님!]`
`[당신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됩니다.]`
`[종족: 인간]`
`[레벨: 1]`
`[체력: 100/100]`
`[마나: 50/50]`
`[힘: 10]`
`[민첩: 8]`
`[지능: 15]`
`[운: 5]`
`[스킬 창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김형수“이… 이게 뭐야? 몰래카메라인가? 아냐, 이런 스케일의 장난은 불가능해…”

형수는 자신의 뺨을 꼬집었다. 따끔했다. 꿈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움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세계? 레벨? 스킬? 마치 게임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현실 감각은 여전히 그를 붙잡고 있었다. 당황했지만,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더 강했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예’를 선택했다.

`[스킬 목록]`
`[1. 통찰 (Insight) – 액티브 스킬]: 대상을 자세히 관찰하여 정보를 획득합니다. (쿨타임: 10초)`
`[2. 생활 마법 (Basic Life Magic) – 액티브 스킬]: 아주 기초적인 생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 작은 불꽃, 물 한 잔)`
`[3. 초보 검술 (Beginner Swordsmanship) – 패시브 스킬]: 검을 다루는 기본 능력이 향상됩니다.`

형수는 스킬 목록을 훑어보았다. 통찰? 생활 마법? 검술? 평범한 회사원이던 그에게는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스킬들이었다. 그나마 ‘통찰’이라도 쓸모 있을까 싶어 바로 사용해보았다. 시야가 잠시 흐려지더니, 주변의 나무들에 대한 정보가 작은 글씨로 나타났다.

`[늙은 느티나무]: 수명이 다한 나무. 마력 잔류 미미.`
`[이름 모를 약초]: 독성 없음. 식용 가능.`

김형수“세상에… 진짜로 다 보이는구나. 근데 이걸로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절망감이 밀려왔다. 그때였다. 덤불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수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숨을 죽이고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했다. 초록색 피부를 가진 작은 생명체가 덤불을 헤치고 나타났다. 키는 그의 무릎 정도였지만, 날카로운 이빨과 사납게 빛나는 붉은 눈이 섬뜩했다. 손에는 누가 봐도 급조한 듯한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고블린이었다.

 

작은 고블린“크르르륵!”

고블린이 으르렁거리며 형수에게 달려들었다. 형수는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현실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죽음의 위협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고블린의 몽둥이가 허공을 갈랐다.

김형수“젠장! 죽을 수는 없어!”

패닉 상태에서도 그의 뇌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스킬! 초보 검술! 비록 검은 없지만, 주먹이나 발로라도 싸워야 했다. 고블린이 다시 몽둥이를 휘두르자, 형수는 몸을 숙여 피하고는 무작정 팔을 뻗어 고블린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지만, 고블린은 잠시 주춤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형수는 온몸의 힘을 실어 고블린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작은 고블린“크엑!”

고블린은 작은 비명과 함께 뒤로 나자빠졌다. 형수는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주저 없이 돌멩이를 집어 들고 쓰러진 고블린에게 달려갔다.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채, 그는 돌멩이를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고블린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김형수“하… 하아… 하아…”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방금, 괴물을 죽였다. 그것도 맨몸으로.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는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죽음의 공포, 그리고 그것을 이겨냈다는 안도감이 뒤섞여 복잡한 감정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의 눈앞에 다시 메시지가 떠올랐다.

`[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10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2로 상승했습니다!]`
`[스킬 포인트 1을 획득했습니다.]`
`[고블린의 이빨 (Goblin’s Tooth) 1개, 고블린의 가죽 (Goblin’s Leather) 1개 를 획득했습니다.]`

바닥에 쓰러진 고블린의 몸이 희미하게 빛나더니, 작은 이빨과 가죽 조각으로 변했다. 형수는 그것들을 주워 들었다. 차가운 이빨과 거친 가죽의 감촉이 그를 현실로 붙잡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평범한 회사원이 아니었다. 이곳은, 생존이 걸린 진짜 이세계였다.